가이우스 마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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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기원전 157년 아르피눔에서 태어난 로마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유구르타 전쟁과 킴브리-테우토니 전쟁에서 활약하며 여러 차례 집정관을 역임했다. 마리우스는 군사 제도 개혁을 통해 로마 군단의 변화를 이끌었으나, 정치적 갈등과 권력 투쟁 속에서 몰락했다. 그는 6번의 집정관을 역임했지만, 퇴역 군인 문제로 인해 사투르니누스와의 갈등을 겪었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아프리카로 도망쳤다. 이후 킨나와 함께 로마로 돌아와 정권을 잡았지만, 곧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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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마리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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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가이우스 마리우스 |
로마자 표기 | Gaius Marius |
출생 | 기원전 157년경 |
출생지 | 이탈리아 체레아테 |
사망일 | 기원전 86년 1월 13일 (70–71세) |
사망지 | 로마 |
배우자 | 율리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모) |
자녀 | 가이우스 마리우스 (소) |
경력 | |
군사 경력 | 누만티아 전쟁 유구르타 전쟁 킴브리 전쟁 동맹시 전쟁 벨룸 옥타비아눔 |
수상 경력 | 로마 개선식 2회 |
관직 | |
호민관 | 기원전 119년 |
법무관 | 기원전 115년 |
프로콘술,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 기원전 114년 |
레가투스, 누미디아 | 기원전 109–108년 |
집정관 | 기원전 107년, 104–100년 |
프로콘술, 이탈리아 | 기원전 88–87년 |
집정관 | 기원전 86년 |
로마 공화정 정보 | |
출신 계급 | 에퀴테스 (노부스 호모) |
씨족 | 마리우스 씨족 |
아우구르 | 기원전 97년 - 86년 |
사령관 | 유구르타 전쟁 (기원전 109년) 킴브리-테우토니 전쟁 (기원전 101년) 동맹시 전쟁 (기원전 91년) 로마 내전 (기원전 87년) |
후계자 | 소 마리우스 |
2. 생애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기원전 157년 라티움 남부 아르피눔(현재의 알피노)의 케레아타에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가난한 노동자 출신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2] 실제로는 키케로 가문, 그라티디우스 가문과 함께 아르피눔에서 유력한 기사계급(최고 부유층 기사 계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피눔은 원래 볼스키족의 도시였고, 로마에 정복당해 무투표 시민권을 부여받았다가, 기원전 188년에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22] 그는 공화정 후기의 웅변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같은 고향 출신이며, '''그라쿠스 형제'''와 동시대 인물이다.
키케로는 자신의 저서에서 "라틴어 문학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리우스의 떡갈나무”라 불리는 나무는 이곳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마리우스와 관련된 장소를 소개했다.
젊은 시절 마리우스는 떨어진 독수리 둥지를 받았는데, 새끼가 일곱 마리 있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마리우스가 최고 권력을 일곱 번 얻을 징조라고 기록했다.[3] 키케로의 기록에 따르면 떡갈나무에 둥지를 틀었던 것으로 보이며, 독수리는 보통 두 개의 알만 낳지만, 고대에는 흔히 있는 기적이었다.[3]
마리우스는 기원전 134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의 사병 군단에 장교로 누만티아 전쟁에 참여했고,[3] 기원전 123년경 군사 집정관(트리부누스 밀리툼, Tribunus Militum)으로 선출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26] 쿠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발리아리쿠스 휘하에서 발레아레스 제도 원정에 참가했을 가능성도 있다.[27]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하자,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휘하에서 부관으로 참전했다.[28]
기원전 107년, 마리우스는 평민 의회를 통해 상원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메텔루스로부터 유구르타 전쟁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31] 기원전 109년 누미디아의 유구르타와 로마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의 부사령관으로 참전했던[4] 마리우스는 기원전 107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아프리카를 담당하게 되었다.[4]
기원전 104년 유구르타와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로마로 개선한 마리우스는 다시 한번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이후 5년 동안 연속으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4] 기원전 102년 아쿠아이 섹스티아이(현재의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테우토네스족을, 이듬해에는 베르첼리에서 킴브리족을 격파했다.
기원전 100년 통산 6번째 집정관에 선출되었지만, 퇴역병 처리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발생한 유혈사태로 평민 계급과 원로원 귀족 계급 양쪽 모두의 신뢰를 잃고 급속히 인기가 떨어졌다.
동맹시 전쟁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참전했고, 술라는 속전속결로 명성을 얻었다. 기원전 88년 술라는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원로원은 그에게 미트라다테스 정벌을 맡겼으나, 민회는 마리우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술라는 자신의 군대를 조직해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마리우스 일파를 숙청했으며, 이때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달아났다.
술라가 그리스로 떠나자 킨나는 마리우스-술피키우스에 대한 복권을 단행했고 로마는 다시 내전 상태로 빠졌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에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귀환해 반대파를 숙청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86년 킨나와 함께 집정관에 다시 한번 선출되었으나, 공식적인 업무가 시작되고 불과 13일 후에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것이 그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집정관직이었다.
2. 1. 어린 시절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기원전 157년 라티움 남쪽의 아르피눔에서 태어났다. 아르피눔은 기원전 4세기 후반 로마에 점령당했고, 처음에는 투표권 없는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가 기원전 188년에야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 다른 로마인들과 달리 이름이 2개뿐이었는데, 이는 그가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임을 보여준다. 플루타르코스는 마리우스의 아버지가 노동자였다고 주장하지만, 마리우스와 로마 귀족들 간의 관계를 보았을 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역적으로 중요한 기사 계급 출신이었다.[2]마리우스는 젊은 시절 원로원의 신인(novus homo)이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대규모 토지 소유로 얻은 상속 재산을 가지고 태어났다.[2] 그의 가족은 로마 정계에서 두 명을 지원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마리우스의 남동생 마르쿠스 마리우스(마르쿠스 마리우스)도 로마 공직 생활에 진출했다.[2]
전설에 따르면, 마리우스는 소년 시절 독수리 둥지에서 7마리의 독수리 새끼를 발견했는데, 이는 훗날 그가 7번의 집정관을 역임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집정관 시절 독수리를 로마 원로원과 시민의 상징으로 도입했다.
기원전 134년, 마리우스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의 사병 군단에 장교로서 누만티아 전쟁에 참여했다.[3]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어느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사람들이 그의 뒤를 이을 장군이 누가 될지를 묻자, 스키피오는 마리우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마도 이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3]
그의 군사 경력 초기에도 마리우스는 로마에서의 정치 경력에 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선거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으로 24명의 특별 군사 트리뷰누스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2. 2. 군 경력
마리우스는 기원전 134년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소 스키피오)가 집정관에 선출되었을 때, 누만티아 전쟁 원정군에 참가하여 기병을 맡았다.[23] 이 원정에서 마리우스는 유구르타와 함께 훈련받았으며,[24] 소 스키피오의 호의를 얻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대신할 사람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마 이 사람(마리우스)일 겁니다"라는 칭찬을 들었다.[25]기원전 123년경, 마리우스는 군사 집정관(트리부누스 밀리툼, Tribunus Militum)으로 선출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26] 쿠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발리아리쿠스 휘하에서 발레아레스 제도 원정에 참가했을 가능성도 있다.[27]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하자, 마리우스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휘하에서 부관으로 참전했다.[28] 무툴 전투에서 마리우스는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누미디아 군을 돌파하여 메텔루스와 합류, 언덕을 점령한 누미디아 보병을 공격하고 누미디아 기병대의 후방을 공격하여 로마군에게 유리하게 전세를 이끌었다.[29]
마리우스는 튀니지 바가 주둔군 사령관 티투스 투르필리우스 실라누스가 로마 군인 부대의 매복 공격에서 살아남은 사건을 두고 메텔루스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30]
기원전 107년, 마리우스는 유구르타 전쟁의 지휘권을 얻기 위해 평민 의회를 통해 상원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메텔루스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았다.[31]
2. 3. 집정관 시기
기원전 109년 누미디아의 유구르타와 로마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당시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어 원정을 떠났는데,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의 부사령관으로 참전했다.[4] 처음에는 로마군이 유리하게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유구르타의 게릴라전에 로마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고 전쟁이 장기화될 위험에 빠지자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와 불화를 겪게 되었다. 마리우스는 결국 자신이 직접 집정관에 출마하여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였는데, 귀족 가문 출신인 메텔루스는 미천한 가문 출신의 마리우스가 집정관이 되려는 것을 비웃으며 로마행의 허가를 미루었다고 한다.메텔루스에게 겨우 허가를 받고 간신히 선거에 맞추어 로마에 도착한 마리우스는 결국 평민과 기사 계급의 지지로 기원전 107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되고 아프리카를 담당하게 되었다.[4] 유구르타를 상대하기 위해서 병력이 더 많이 필요했던 마리우스는 대대적인 군사 제도의 개편을 추구하였다. 이 개혁으로 재산이 없는 사람도 군단에 지원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마리우스는 대폭 증원된 로마 군단을 이끌고 유구르타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원전 104년 유구르타와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로마로 개선한 마리우스는 다시 한번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이때부터 매년 계속해서 5년 동안 집정관에 뽑혔다.[4] 마리우스는 다시 한번 대폭적인 군사 제도 개편을 실시하고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 부족들과의 전투를 벌였고 연이어 승리했다.
기원전 102년 아쿠아이 섹스티아이(현재의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테우토네스족을 패배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원정에서 실패한 공동 집정관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함께 베르첼리에서 킴브리족을 패배시켰고 함께 로마로 개선했다. 이때가 마리우스의 생애 최고의 정점에 이른 시기이고 이후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마리우스는 기원전 107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그의 동료였다. 상원은 누미디아에서 메텔루스의 지휘권을 연장했지만, 마리우스는 트리뷴이었던 그의 동맹 티투스 만리우스 만키누스를 설득하여 평민 의회가 상원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그에게 지휘권을 주도록 하였다.
누미디아의 병력을 증강하고 약속했던 신속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마리우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병력 공급원인 재산 소유 남성들을 모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상원은 마리우스가 일반적인 방법으로 병사를 징집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그는 승리와 약탈을 약속하며 특히 제대한 베테랑들과 재산이 없는 남성들 사이에서 자원병을 모집하는 것을 선호했다.
마리우스는 전쟁을 끝내는 것이 이전에 자랑했던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구르타는 게릴라전을 벌였고, 메텔루스의 유구르타에게 지역적인 지원과 보강을 거부하는 전략보다 더 나은 전략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리우스는 기원전 107년에 비교적 늦게 도착했지만 여전히 키르타(현재 알제리 콘스탄틴) 근처에서 전투를 치르고 승리했다. 107년 말, 그는 극남의 캅사로 위험한 사막 행군을 통해 유구르타를 기습했다. 그곳에서 마을이 항복한 후 그는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남은 생존자들을 노예로 만들고, 마을을 파괴한 다음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압박을 계속하면서 그는 유구르타의 군대를 남쪽과 서쪽으로 마우레타니아로 몰아넣었다.
궁극적으로 마리우스는 보쿠스 1세와 거래를 성사시켰는데, 보쿠스의 궁정 사람들과 친분이 있는 술라가 보쿠스의 진영에 들어가 유구르타를 인질로 받게 될 것이었다. 마우레타니아인의 배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술라는 동의했고, 유구르타의 남은 추종자들은 학살되었고, 유구르타 자신은 보쿠스에 의해 쇠사슬에 묶인 채 술라에게 넘겨졌다.[4] 그 후, 보쿠스는 유구르타 왕국의 서쪽 지역을 합병하고 로마의 동맹국으로 인정받았다. 유구르타는 로마의 지하 감옥(툴리아눔)에 던져졌고, 기원전 104년 마리우스의 개선식에서 죽었다.
개선식 후 술라와 마리우스는 유구르타를 사로잡은 공로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다투었다. 술라는 로마의 전통에 따라 마리우스의 부하로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 공로는 마리우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술라와 그의 귀족 동맹들은 마리우스의 승리를 실추시키기 위해 술라의 직접적인 책임에 초점을 맞췄다.[5]
마리우스는 기원전 104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아직 아프리카에 있었다. 집정관직을 시작하며 마리우스는 아프리카에서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하며 돌아와, 유구르타와 북아프리카의 부를 가져와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마리우스는 킴브리족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갈리아 속주를 배당받았다.
킴브리족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서쪽으로 히스파니아로 진군했다. 마리우스는 사실상 처음부터 갈리아 군단을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지난 해 훈련받은 정예 군단병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다시 재산 요건 면제를 확보했으며, 승리로 새롭게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약 3만 명의 로마 시민과 4만 명의 이탈리아 동맹군과 보조군을 모았다. 그는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근처에 기지를 세우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기원전 104년, 마리우스는 기원전 103년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프로콘술로 계속 활동할 수도 있었지만, 카이피오와 말리우스 사건과 같은 또 다른 지휘권 분쟁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그를 집정관으로 재선출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103년, 게르만족은 여전히 히스파니아에서 나오지 않았고, 마리우스의 동료가 사망하여 마리우스는 선거를 위해 로마로 돌아와야 했다. 지난 2년간 킴브리족과의 갈등에 결정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마리우스가 재선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젊은 트리뷰누스인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가 투표 전 공개 회의에서 호소한 것과 – 인지도가 높지 않은 후보들이 많았던 것도 한몫했다 – 마리우스는 기원전 102년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동료는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였다.
2. 4. 마리우스의 쇠퇴
기원전 100년 마리우스는 통산 6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지만, 오랜 전쟁에서 돌아온 퇴역병 처리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호민관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였는데, 그는 그라쿠스 형제의 숭배자로 여러 개혁안을 제시했고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이 이에 동조하여 원로원을 자극했다. 마리우스는 양측에서 조정자 역할을 해야 했으나, 이러한 일에 서툴렀다. 결국 양측은 그라쿠스 형제 때처럼 격돌하여 유혈사태까지 벌어졌고 사투르니누스는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마리우스는 평민 계급과 원로원 귀족 계급 양쪽 모두의 신뢰를 잃고 급속히 인기가 떨어졌다.1840년대 독일에서 시작된 근대 학계에서는 마리우스가 기원전 107년부터 100년 사이 집정관 재임 기간 동안 군대에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했다는 주장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2세기 동안 이탈리아 인구가 감소했다는 증거, 로마군에 대한 주요 개혁이 2세기에 발생했다는 증거, 그리고 마리우스가 그러한 개혁을 주도했다는 증거는 매우 부족하다.
살루스트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07년 proletariila 모집은 일회성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원병들은 전쟁 후 해산되었고, 마리우스는 킴브리족과의 전투 지휘를 맡았을 때 기존 방식대로 모집된 집정관 군대의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자원병 공개 모집이 군단의 사회적 구성을 바꾸었다는 징후는 없으며, 후대의 기록들은 로마인들이 여전히 대부분의 군대를 징집을 통해 충원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마리우스에게 돌려지는 다른 개혁으로는 시민 기병대와 경보병의 폐지, pilumla의 재설계, 모든 군단에 대한 표준화된 독수리 군기, 그리고 코호르트로 마니플을 대체한 것이 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까지 시민 기병대와 경보병이 폐지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으며, 여전히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마리우스가 pilumla을 재설계했다면, 고고학적 발견은 그의 설계가 곧 폐기되었음을 나타낸다.
기원전 100년의 사건 이후, 마리우스는 기원전 103년 사투르니누스에 의해 망명당했던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귀환에 반대하려 했다. 그러나 반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마리우스는 기원전 98년, 명목상으로는 여신 마그나 마테르(Magna Mater)에게 한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갈라티아로 동방으로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자발적인 망명을 여섯 번이나 집정관을 지낸 그에게 큰 굴욕으로 묘사한다. "귀족들과 백성 모두에게 불쾌감을 주었다"고 여겨진 그는 기원전 97년 감찰관직에 대한 입후보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마리우스의 소위 "굴욕"이 너무 오래 지속될 수 없었음을 지적했다. 기원전 98-97년경, 그는 소아시아에 있는 동안 사제단인 아우구르의 직책에 ''부재중''으로 선출되는 전례 없는 영예를 얻었다. 게다가, 기원전 101년 집정관으로서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의 재판에 마리우스가 단순히 참석한 것만으로도, 그가 명백히 유죄였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의 무죄를 확보하기에 충분했다.
2. 5. 동맹시 전쟁과 술라의 내전
동맹시 전쟁에서 마리우스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참전했고, 술라는 속전속결로 명성을 얻었다. 결국 동맹시에 시민권을 확대하면서 동맹시 전쟁은 종결되었으나, 이 틈을 타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가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이에 대한 응징을 놓고 로마는 둘로 나뉘었다. 기원전 88년 술라는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원로원은 그에게 미트라다테스 정벌을 맡겼으나, 민회는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선동으로 마리우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술라는 자신의 정당한 지휘권이 빼앗긴 데 대해 반기를 들고 자신의 군대를 조직해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참수하는 한편 마리우스-술피키우스 일파에 대한 숙청 작업을 벌였다. 이때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달아났다.
한편 로마의 내전으로 어수선한 틈을 노려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는 다시 그리스에서 반로마의 기치를 올렸고 아테네가 이에 합세했다. 술라는 기원전 87년의 집정관인 킨나와 옥타비우스에게 로마를 맡기고 그리스로 원정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술라가 그리스로 떠나자마자 킨나는 마리우스-술피키우스에 대한 복권을 단행했고 로마는 다시 내전 상태로 빠졌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에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귀환해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의 숙청을 단행했는데, 이때 원로원 의원 50명, 기사 계급의 1,000여 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기원전 86년 마리우스는 킨나와 함께 집정관에 다시 한번 선출되었다. 이것이 그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집정관직이었고, 마리우스는 공식적인 업무가 시작되고 불과 13일 후에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3. 주요 업적
기원전 108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는 누미디아의 유구르타를 상대로 한 원정에서 마리우스를 부사령관으로 참전시켰다.[4] 초기에는 로마군이 유리했지만, 유구르타의 게릴라전에 고전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될 위험에 처했다.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와 불화를 겪고 직접 집정관에 출마하여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4] 귀족 출신인 메텔루스는 미천한 가문 출신의 마리우스가 집정관이 되려는 것을 비웃으며 로마행 허가를 미루었다고 한다.
메텔루스에게 겨우 허가를 받고 로마에 도착한 마리우스는 평민과 기사 계급의 지지로 기원전 107년 집정관에 당선되어 아프리카를 담당하게 되었다.[4] 마리우스는 병사들과 함께 식사하고 노동을 함께하며 존경을 얻었다. 그는 또한 메텔루스 군대의 절반으로 며칠 안에 유구르타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이탈리아 상인들의 지지를 얻었다.[4]
기원전 107년 말, 마리우스는 캅사로 위험한 사막 행군을 통해 유구르타를 기습했다.[4] 그곳에서 마을이 항복한 후 그는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남은 생존자들을 노예로 만들고, 마을을 파괴한 다음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편, 유구르타는 그의 장인인 마우레타니아의 왕 보쿠스 1세를 로마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시키려고 했다.[4]
로마가 군사적으로 유구르타의 게릴라 전술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마리우스는 보쿠스와 협상을 재개했다.[4] 결국 마리우스는 보쿠스와 거래를 성사시켰는데, 보쿠스의 궁정 사람들과 친분이 있는 술라가 보쿠스의 진영에 들어가 유구르타를 인질로 받게 되었다.[4] 마우레타니아인의 배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술라는 동의했고, 유구르타의 남은 추종자들은 학살되었고, 유구르타 자신은 보쿠스에 의해 쇠사슬에 묶인 채 술라에게 넘겨졌다. 그 후, 보쿠스는 유구르타 왕국의 서쪽 지역을 합병하고 로마의 동맹국으로 인정받았다.[4] 유구르타는 로마의 지하 감옥(툴리아눔)에 던져졌고, 기원전 104년 마리우스의 개선식에서 죽었다.
기원전 104년 유구르타와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로마로 개선한 마리우스는 다시 한번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이후 5년 동안 연속으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4] 마리우스는 기원전 104년에 집정관직을 시작하며 아프리카에서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하며 돌아왔다. 유구르타와 북아프리카의 부를 가져와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26] 로마의 정복과 파괴를 예언했던 유구르타는 로마의 감옥에서 사슬에 묶인 채 거리로 끌려다닌 후 최후를 맞았다. 마리우스는 킴브리족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갈리아 속주를 배당받았다.
기원전 102년, 마리우스는 아쿠아이 섹스티아이(현재의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테우토네스족을 패배시켰으며,[5] 이듬해에는 공동 집정관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함께 베르첼리에서 킴브리족을 패배시키고 함께 로마로 개선했다.
3. 1. 군제 개혁
마리우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병력 공급원인 재산 소유 남성들을 모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의 일반적인 관행은 비상사태가 아닌 한 재산 소유 시민만 군단에 입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상원은 마리우스가 일반적인 방법으로 병사를 징집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그는 승리와 약탈을 약속하며 특히 제대한 베테랑(evocatila)과 재산이 없는 남성(capite censila) 사이에서 자원병을 모집하는 것을 선호했다.
1840년대 독일을 시작으로 근대 학계에서는 마리우스가 기원전 107년부터 100년 사이 집정관 재임 기간 동안 군대에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했다는 주장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일반적인 설명은 일련의 인력 부족 이후,[6] 마리우스가 기원전 107년 유구르타 전쟁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인 proletariila 출신 자원병을 모집할 수 있도록 특별 허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2세기 동안 이탈리아 인구가 감소했다는 증거, 로마군에 대한 주요 개혁이 2세기에 발생했다는 증거, 그리고 마리우스가 그러한 개혁을 주도했다는 증거는 매우 부족하다. 현재 전문가들은 이러한 "마리우스 개혁"을 "근대 학문의 산물"로 치부하는 경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7][8]
살루스트의 기록에 따르면,la 모집은 일회성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원병들은 전쟁 후 해산되었고, 마리우스는 킴브리 전쟁 지휘를 맡았을 때 기존 방식대로 모집된 집정관 군대의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자원병 공개 모집이 군단의 사회적 구성을 바꾸었다는 징후는 없으며, 후대의 기록들은 로마인들이 여전히 대부분의 군대를 징집을 통해 충원했다는 점을 보여준다.[9] 후기 공화정 시대의 군대는 여전히 주로 농촌 인구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부유함과 퇴직금을 찾아 장군들의 고객이 되고, 그 군대를 이용해 공화정을 전복한 가난한 자원병들이 군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현재 거부되고 있다.[10]
마리우스에게 돌려지는 다른 개혁으로는 시민 기병대와 경보병의 폐지, pilumla의 재설계, 모든 군단에 대한 표준화된 독수리 군기, 그리고 마니풀을 코호르트로 대체한 것이 있다. 기원전 1세기까지 시민 기병대와 경보병이 폐지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으며, 여전히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11] 마리우스가 pilumla을 재설계했다면, 고고학적 발견은 그의 설계가 곧 폐기되었음을 나타낸다.[12] 문헌 자료는 독수리 군기가 소와 늑대를 포함한 다른 전통적인 동물 군기와 함께 후기 공화정 시대까지 공존했음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마리우스가 코호르트를 도입했다는 고대의 증거는 없다. 살루스트의 서술은 기원전 109년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지휘하에서 마니풀의 마지막 기록을 보여준다.[13]
통상적인 역사 서술에서 "마리우스의 노새"(muli Marianila)로 알려진, 보급 체계와 훈련에 대한 변화는 로마 장군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승리를 추구하는 그들은 일반적으로 대규모 수송대 없이 작전하는 속도의 이점을 추구하고, 병사들이 전투에 잘 훈련되도록 했다.
플루타르크와 살루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마리우스의 로마 군단 모병 제도 개혁은 장군에게 충성하고 그들의 후원이나 국가로부터의 급여 확보 능력에 의존하는 군대를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에반스는 이러한 변화가 마리우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며, 누미디아와 킴브리족의 엄청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후기 공화정 시대의 군대는 중기 공화정 시대의 군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족 로마 시민을 죽이는 병사들의 태도는 동맹시 전쟁 이후 변화했다. "만약 술라의 군대가 로마를 공격하려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마리우스나 술라가 권력욕에 눈이 멀었다 해도 결과는 분명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동맹시 전쟁은 로마 정부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린토트(Lintott)는 『캠브리지 고대사(Cambridge Ancient History)』에서 유사하게 "로마 군대는 이탈리아 동맹군과의 혈투 속에서 양심의 가책을 잊은 후에야 내전에 사용될 수 있었다... 내전이 이기적인 비도덕적인 병사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복무 후 토지 약속에는 정치적 영향이 있었다. proletariila를 소집하기로 한 결정은 병력 감축 시점까지는 그 영향이 완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전리품이 병사들에 대한 보상으로 부족해짐에 따라(전리품은 장기적인 수입원을 보장하지 못함) 해외에 퇴역 군인들의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토지 할당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 퇴역 군인들의 토지 보상에 대한 정치적 불안은 과장되었다. 마리아누스 시대와 마리아누스 이후 시대의 병사들은 토지 요구가 즉각 충족되지 않더라도 대체로 평화롭게 고향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마리아누스 이후 시대에도 토지 분배는 산발적이었으며, 제대 시 토지에 대한 약속이나 합리적인 기대 없이 자원병들이 모집되었다. 퇴역 군인들의 토지 요구가 기대가 된 것은 기원전 마지막 세기 후반부터였으며, 나중에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충족되었다.
3. 2. 유구르타 전쟁 승리
기원전 109년 누미디아의 유구르타와 로마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당시 집정관이었던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어 원정을 떠났고,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의 부사령관으로 참전했다.[4] 처음에는 로마군이 유리하게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유구르타의 게릴라 전에 로마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될 위험에 빠지자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와 불화를 겪게 되었고, 자신이 직접 집정관에 출마하여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였다.[4] 귀족 가문 출신인 메텔루스는 미천한 가문 출신의 마리우스가 집정관이 되려는 것을 비웃으며 로마행 허가를 미루었다고 한다.메텔루스에게 겨우 허가를 받고 간신히 선거에 맞추어 로마에 도착한 마리우스는 평민과 기사 계급의 지지로 기원전 107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되고 아프리카를 담당하게 되었다.[4] 유구르타를 상대하기 위해 병력이 더 많이 필요했던 마리우스는 재산이 없는 사람도 군단에 지원할 수 있도록 군사 제도를 개편하여 대폭 증원된 로마 군단을 이끌고 유구르타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4] 이때 그의 부하였던 술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무툴 전투에서 마리우스는 2,000명의 병력으로 누미디아 군을 통과하여 메텔루스와 합류했고, 함께 언덕을 점령한 누미디아 보병을 공격하여 메텔루스의 군대를 궤멸로부터 구했다.[4] 언덕을 장악한 후 마리우스와 메텔루스는 누미디아 기병대의 후방을 공격했고, 로마군이 주도권을 잡자 누미디아 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마리우스는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그들의 노동을 기꺼이 함께 나눔으로써 병사들의 존경을 얻었다. 그는 또한 메텔루스의 군대 절반으로 며칠 안에 유구르타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이탈리아 상인들의 지지를 얻었다.[4]
기원전 109년과 108년 겨울, 바가 주둔군으로 복무하던 로마 군인 부대가 매복 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했다.[4] 메텔루스의 의뢰인인 티투스 투르필리우스 실라누스라는 주둔군 사령관은 무사히 탈출했는데,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에게 실라누스를 겁쟁이 혐의로 사형에 처하라고 주장했다가, 그 형벌이 불균형적이고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주장하며 메텔루스를 비난했다.
유구르타에 대한 신속한 승리에 대한 정치적 압력과 전쟁 수행에 대한 상원의 행동에 대한 기사 계급의 적대감이 커지면서, 마리우스는 기원전 107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4] 상원은 누미디아에서 메텔루스의 지휘권을 연장했으나, 마리우스는 당시 트리뷰누스였던 그의 동맹 티투스 만리우스 만키누스를 설득하여 ''concilium plebis''가 상원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그에게 지휘권을 주도록 하였다.
마리우스는 전쟁을 끝내는 것이 이전에 자랑했던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구르타는 게릴라전을 벌였고, 메텔루스의 유구르타에게 지역적인 지원과 보강을 거부하는 전략보다 더 나은 전략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기원전 107년 말, 그는 극남의 캅사로 위험한 사막 행군을 통해 유구르타를 기습했다.[4] 그곳에서 마을이 항복한 후 그는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남은 생존자들을 노예로 만들고, 마을을 파괴한 다음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편, 유구르타는 그의 장인인 마우레타니아의 왕 보쿠스를 로마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시키려고 했다.[4] 기원전 106년, 마리우스는 그의 군대를 서쪽으로 멀리 행군하여 몰로카트 강 근처의 요새를 점령했다.[4] 세리프 서쪽 사막에서 마리우스는 누미디아와 마우레타니아 연합군에 의해 기습을 당했다. 마리우스는 한 번도 행동에 대비하지 못했고, 혼란 속에서 방어 진형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마우레타니아와 가에툴리아 기병들이 공격을 가했고, 한동안 마리우스와 그의 주력 부대는 언덕 위에 포위되었고, 술라와 그의 부대는 근처의 다른 언덕에서 방어 태세를 취했다. 로마인들은 저녁까지 적을 막아냈고, 아프리카인들은 물러났다. 다음 날 새벽 로마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의 경계가 허술한 진영을 기습하여 누미디아-마우레타니아 연합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로마가 군사적 수단으로 유구르타의 게릴라 전술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마리우스는 전투에 참여했지만 아직 전쟁을 선포하지 않은 보쿠스와 협상을 재개했다.[4] 궁극적으로 마리우스는 보쿠스와 거래를 성사시켰는데, 보쿠스의 궁정 사람들과 친분이 있는 술라가 보쿠스의 진영에 들어가 유구르타를 인질로 받게 될 것이었다.[4] 마우레타니아인의 배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술라는 동의했고, 유구르타의 남은 추종자들은 학살되었고, 유구르타 자신은 보쿠스에 의해 쇠사슬에 묶인 채 술라에게 넘겨졌다. 그 후, 보쿠스는 유구르타 왕국의 서쪽 지역을 합병하고 로마의 동맹국으로 인정받았다.[4] 유구르타는 로마의 지하 감옥(툴리아눔)에 던져졌고, 기원전 104년 마리우스의 개선식에서 죽었다.
기원전 104년 유구르타와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로마로 개선한 마리우스는 다시 한번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이때부터 매년 계속해서 5년 동안 집정관에 뽑혔다.[4]
3. 3. 킴브리-테우토니 전쟁 승리
마리우스는 기원전 107년 집정관으로 당선된 후, 유구르타 전쟁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대대적인 군사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이 개혁으로 재산이 없는 사람도 군단에 지원할 수 있게 되었고, 마리우스는 대폭 증원된 로마 군단을 이끌고 유구르타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기원전 104년, 유구르타와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로마로 개선한 마리우스는 다시 한번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이후 5년 동안 연속으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다시 한번 대대적인 군사 제도 개편을 실시하고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 부족들과의 전투를 벌여 연이어 승리했다.
기원전 102년, 아쿠아이 섹스티아이(현재의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테우토네스족을 패배시켰으며,[5] 이듬해에는 공동 집정관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함께 베르첼리에서 킴브리족을 패배시키고 함께 로마로 개선했다. 이때가 마리우스의 생애 최고의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4. 정치적 갈등과 몰락
마리우스가 동방에 머물렀던 기간과 귀환 후 몇 년 동안 로마는 상대적인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기원전 95년 로마는 ''렉스 리키니아 무키아''라는 법령을 통과시켜 로마 시민이 아닌 모든 거주민을 도시에서 추방했다. 기원전 91년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호민관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토지 개혁과 곡물 배급법으로 평민을 지원하고, 토지 개혁으로 인한 이탈리아의 재산권 침해에 대한 보상으로 이탈리아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며, 기사 계급으로 상원을 확대하는 광범위한 개혁 프로그램을 제안했다.[20] 마리우스는 드루수스의 이탈리아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21] 그러나 드루수스가 암살당한 후,[20]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기원전 91~87년의 동맹 전쟁에서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라틴어로 동맹국을 뜻하는 ''socii''에서 따온 이름이다.[20]
이후 전투에서 마리우스는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고위 참모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20] 그는 아마도 마리우스의 친척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21] 루푸스는 기원전 90년 6월 11일 톨레누스 강을 건너다 마르시족의 매복 공격으로 사망했다. 다른 부대를 지휘하던 마리우스는 적을 격퇴하고 큰 피해를 입혔다.[20] 루푸스가 죽은 후 상원은 마리우스를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함께 공동 지휘관으로 임명했지만, 카이피오는 곧 배신하여 마리우스가 단독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20] 마리우스는 전쟁의 북부 전선을 장악한 후, 적극적으로 전진하여 전 참모 술라의 도움을 받아 푸치네 호수 남쪽 구릉지에서 마르시족을 물리쳤다. 마르루키니의 집정관 헤리우스 아시니우스도 전사자 중 한 명이었다.[20]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마리우스는 이후 무기력 상태에 빠져 추격을 거부했는데, 아마도 자신의 부하들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팝파에디우스 실로는 그에게 "그렇다면 마리우스 장군, 당신이 그토록 위대한 장군이라면 왜 [요새에서 내려와] 싸우지 않습니까?"라고 도전했다. 마리우스는 "자, 당신이 훌륭한 장군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나를 시험해 보지 않습니까?"라고 응수했다.[20]
다음 해 마리우스는 집정관 중 한 명인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카토에 의해 지휘권에서 해임되었다. 그가 다른 지휘권을 받지 못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그의 나이가 그의 경험에 비해 너무 많았을 것이다."[20] 마리우스가 질병으로 인해 지휘권을 포기했거나, 공격성이 부족하다는 인식 아래 해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21] 전쟁은 매우 치열했지만, 로마가 기원전 90년 충성을 다하거나 즉시 무기를 내려놓는 모든 동맹국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율리아 법을 제정함에 따라 몇 년 안에 끝났다.[20] 마리우스는 고위직에서 복무하고 적어도 몇 번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갈등에서 많은 영예를 얻지는 못했다. 아마도 이 경험은 그가 더 많은 지휘권과 영광을 갈망하게 했고, 동방에서 지휘권을 추구하는 길로 들어서게 했을 것이다.[21]
공화정 중기와 후기에 그락쿠스 형제 살해 사건을 시작으로 정치적 폭력이 점차 정상화되었지만, 마리우스의 여섯 번째 집정관 시대에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에 대한 senatus consultum ultimumla (최종 권고)가 통과되면서, 폭력 사용이 사적 시민뿐만 아니라 "[원로원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적법하게 선출된 관리들"에 대해서도 정상화되었다.[21]
마리우스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초기에 술라의 지휘권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는 그 폭력의 범위를 엄청나게 확장시켰다. 더 이상 로마 거리에서 폭도들만 충돌하지 않았다. 더 이상 개인적인 원한이 법정에서 단순한 정치적 기소로 해결되지 않았다. 정적들이 살해되었다.[21] 시민회의 사용은 원로원의 통제력을 약화시켰고, 술라가 로마로 진군하기로 결정한 것과 함께 상당하고 장기적인 불안정을 초래하여, 공화정 형태의 정부 파괴와 제국으로의 이행으로만 해결되었다.[21]
4. 1. 메텔루스 가문과의 갈등
기원전 119년, 호민관에 선출되었다.[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2] 마리우스는 "투표 운영과 관련된 마리우스 법(Lex Maria de suffragiis ferendis, 비밀 투표를 위해 투표소 다리를 좁게 만드는 법)"을 플레브스 민회에서 통과시켰다.[3]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이에 반대하여 원로원을 설득, 마리우스를 소환했다. 마리우스는 코타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를 투옥하겠다고 위협했다.[4]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같은 해 곡물 배급 법안(Rogatio frumentaria)이 제출되었을 때 마리우스는 반대했다.[5]4. 2. 사투르니누스와의 관계
기원전 100년 마리우스는 통산 6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지만, 오랜 전쟁에서 돌아온 퇴역병 처리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당시 호민관은 그라쿠스 형제의 숭배자인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였는데, 그는 여러 개혁안을 제시했고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이 이에 동조하여 원로원을 자극했다.마리우스는 집정관으로서 양측의 조정자 역할을 해야 했으나, 이러한 일에 서툴렀다. 양측은 그라쿠스 형제 때처럼 격돌하여 유혈 사태까지 벌어졌고, 결국 사투르니누스는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마리우스는 평민 계급과 원로원 귀족 계급 양쪽 모두에게 신뢰를 잃고 급속히 인기가 떨어졌다.[1]
4. 3. 술라와의 내전
기원전 88년 술라는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원로원은 그에게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 정벌을 맡겼으나, 민회는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선동으로 마리우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20] 술라는 자신의 정당한 지휘권이 빼앗긴 데 대해 반기를 들고 자신의 군대를 조직해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참수하는 한편 마리우스-술피키우스 일파에 대한 숙청 작업을 벌였다. 이때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달아났다.한편 로마의 내전으로 어수선한 틈을 노려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는 다시 그리스에서 반-로마의 기치를 올렸고 아테네가 이에 합세했다. 술라는 기원전 87년의 집정관인 킨나와 옥타비우스에게 로마를 맡기고 그리스로 원정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술라가 그리스로 떠나자마자 킨나는 마리우스-술피키우스에 대한 복권을 단행했고 로마는 다시 내전상태로 빠졌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에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귀환해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의 숙청을 단행했는데 이때 원로원 의원 50명, 기사계급의 1,000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기원전 86년 마리우스는 킨나와 함께 집정관에 다시 한번 선출되었다. 이것이 그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집정관직이었고 마리우스는 공식적인 업무가 시작되고 불과 13일 후에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5. 평가
플로루스는 킴브리족이 트렌토를 거쳐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베네치아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타락했다고 말하지만, 행군 거리로 보아 상당히 무리가 있으며, 포위할 의도였다면 알프스 북서쪽의 그랑 산 베르나르 협곡을 넘어 침입했을 가능성도 있고, 전투는 페라라 근교에서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101년, 동료 집정관은 '''마니우스 아퀴리우스'''였고, 마리우스는 프로콘술 카툴루스와 합류하여 웰케라에(현 베르첼리) 주변에서 킴브리족과 싸워 6월 30일에 승리하고, 두 번의 승리를 카툴루스와 함께 개선식으로 축하했다고 한다. 개선식은 7월 30일이었다. 나중에 이 전장 근처 에포레디아(현 이브레아)에 식민 도시가 건설되었다. 리비우스의 개요에 따르면, 마리우스를 싫어했던 로마의 유력자들도 그의 공적을 인정했으며[30],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마리우스는 세 번째 건국자로 칭송받았다고 한다. 마리우스는 승리를 기념하여 로마 시에 호노르스와 비르투스 신전 등의 시설을 건설했다.
6. 연표
- 기원전 157년 - 아르피눔에서 태어남[1]
- 기원전 134년 - 히스파니아에서 복무[2]
- 기원전 120년 - 호민관 당선[3]
- 기원전 116년 - 법무관 당선[4]
- 기원전 114년 - 히스파니아 지방의 총독으로 파견[5]
- 기원전 110년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인 율리아와 결혼[6]
- 기원전 109년 - 메텔루스의 부관으로 군무에 복귀[7]
- 기원전 107년 - 첫 번째 집정관직[8], 군제 개혁 단행 (마리우스의 개혁)[9]
- 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0년 - 다섯번의 집정관직 연임[10]
- 기원전 101년 - 게르만 부족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음[11]
- 기원전 91년 ~ 기원전 88년 - 동맹시 전쟁으로 군무에 복귀[12]
- 기원전 87년
- *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거래하여 미트라다테스 6세 정벌군의 사령관으로 뽑힘[13]
- * 술라가 로마 진격에 성공, 정권을 잡음[14]
- * 마리우스와 아들, 아프리카로 도망[15]
- * 킨나와 함께 새로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와 다시 정권을 잡고 대대적 숙청 단행[16]
- 기원전 86년
- * 일곱 번째 집정관직[17]
- * 1월 13일 죽음[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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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d ''velites'' really disappear in the late Roman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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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名言行録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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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名言行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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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ーマ世界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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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istory of Rome to the Battle of Act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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